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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 출생의 비밀, 왕건과의 만남, '고려'라고 지은 이유

by 다시한번도전 2024. 7. 1.

승려의 삶을 살았던 궁예
승려의 삶을 살았던 궁예

 

궁예 출생의 비밀

많은 사람은 궁예라는 이름을 들으면 자연스레 폭군이란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궁예는 혼란스러웠던 시대에 군사들과 함께 용감히 싸워 후삼국 중 가장 많은 영토를 차지했던 장군이자 왕이기도 했습니다.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 속에서 이상적인 국가를 세우려 한 지도자이기도 했습니다. 궁예 하면 안대도 같이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가 항상 안대를 쓴 이유는 출생의 비밀에 있습니다. 궁예는 태어나자마자 불행한 운명에 휘말립니다. 한 남자가 포대기에 싸여 있던 갓난아기 궁예를 낚아채 지붕 위로 올라간 뒤 그 위에서 지붕 아래로 던져버린 것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 있을 수 없는 충격적인 일이지만 구사일생으로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지붕 아래에 있던 유모가 떨어지는 아기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품에 안긴 아기의 눈에서 피가 엄청 많이 나고 있었습니다. 유모가 아기를 받아 안는 순간 그만 눈을 찌르고 만 것입니다. 이런 사연으로 궁예는 목숨은 부지했지만 한쪽 눈은 잃게 되었습니다. 궁예를 던져버린 남자가 궁예를 죽이려 했던 이유는 바로 궁예의 정체 때문이었습니다. 궁예가 신라의 왕자였기 때문입니다. 왕의 후궁이었던 궁예의 어머니는 궁궐 밖에 있는 자기 집에서 궁예를 낳았습니다. 곧장 전해진 궁예의 탄생 소식에 궁궐은 소란스러워졌습니다. 너무 불길한 운을 타고나 나라에 해가 될 아이라고 천문을 해석하는 일관이 왕에게 보고했기 때문입니다. 일관의 말을 들은 신라의 왕은 궁예를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유모는 궁예를 품에 안고 도망쳤고 자기 아들처럼 키웠습니다.

 

왕건과의 만남

궁예는 세력을 모아 신라가 아닌 새로운 나라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뜻을 펼치기 위해 호족의 밑으로 들어가 힘을 기른 후 동쪽 땅을 공략하며 세력을 펼쳤습니다. 여기에 만족하지 못한 궁예는 패서 및 패강 지역을 욕심내며 서쪽으로 향했습니다. 통일신라의 땅이 된 지 200여 년이나 지난 뒤였지만, 신라 말기에 지방 호족들이 독립하는 분위기가 되자 이 지역 호족들은 고구려 계승의식을 강하게 내세우곤 했습니다. 이들은 패서 및 패강 지역으로 진출하려는 궁예의 영향력을 실감하고는 궁예에게 땅을 바치며 신하가 되겠다고 복종했습니다. 그리고 이때 궁예의 인생을 바꾼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훗날 궁예의 심복이자 태봉국 최고의 장수가 되는 왕건을 만난 것입니다. 궁예에게 투항했던 호족 중에는 송악 호족인 왕륭과 그의 아들 왕건도 있었습니다. 왕건은 자신의 임무를 아주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궁예는 전장에서도 왕건을 활용합니다. 왕건은 기마병을 통솔하는 정기대감 직을 받고 전쟁에 나가 양주와 견주 등 한강 하류로 진출하며 궁예의 세력 확장을 도왔습니다. 이처럼 뛰어난 활약을 펼치면서 왕건은 궁예의 신임을 쌓아가게 됩니다. 건국을 준비하던 궁예에게는 한강 유역을 온전하게 차지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이미 한강 하류 지역을 차지한 궁예는 한강 중상류에서 세력을 떨치던 북원의 대호족 양길과 싸워 이겨야만 했습니다. 궁예는 왕건의 도움을 받아 양길과 전쟁을 펼쳤고, 결과는 대승이었습니다. 궁예는 이 기세를 몰아 왕건에게 경기도 남부 지역과 충청도 지역까지 점령하라고 명령합니다. 왕건은 매번 능력을 발휘하며 승리를 거머쥐었고, 궁예가 한반도 중부 지역을 점령하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고려'라고 지은 이유

한반도 중부 지역을 장악한 궁예는 드디어 꿈을 이루었습니다. 자신의 나라를 세운 것입니다. 왕실로부터 버림받고 떠돌이 승려의 삶을 살아온 궁예는 901년, 송악을 도읍으로 삼고 건국을 선포했습니다. 그때 궁예가 세운 나라 이름이 바로 '고려'입니다. 많은 사람이 고려를 왕건이 세운 나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궁예가 세운 나라 이름 또한 고려였습니다. 궁예가 자신이 세운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지은 이유는 자신이 고구려를 잇는다는 점을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고구려를 잇는데 고구려에서 '구' 자를 뺀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실은 많은 사람이 고구려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는, 삼국 시대에 만주와 한반도에서 패권을 차지한 나라의 이름도 고려였습니다. 고구려라는 이름으로 세워지긴 했지만, 광개토대왕의 아들로 잘 알려진 장수왕이 국호를 '고려'로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옛 고구려도, 궁예의 나라도, 왕건이 세운 나라도 전부 '고려'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입니다. 다만 후대 사람들이 이를 쉽게 구분하기 위해 고구려, 후고구려, 고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궁예가 고려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자신이 세운 나라가 '고구려를 잇는 나라'라는 정체성을 확실히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궁예는 고구려와 관계없는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나라 이름을 고려로 짓고 고구려의 원수를 갚겠다고 하면서까지 고구려 계승의식을 드러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송악, 패서 등 경기 북부와 황해도 지역 호족들의 도움을 받아 건국한 만큼 그들의 호응을 얻어야 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