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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김만덕 비극적인 유년기, 신분 하락, 상인의 삶

by 다시한번도전 2024. 7. 7.

기생에서 상인이 된 김만덕
기생에서 상인이 된 김만덕

 

기생 김만덕의 비극적인 유년기

1739년, 김만덕은 양인 부모님 아래 2남 1녀 중 둘째 딸로 제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조선 시대에 제주도는 역모 등 중죄를 저지르거나 왕족 중 폐위된 인물이 가게 되는 최악의 유배지기도 했던 터라 많은 이들이 일평생 가고 싶지 않아 하는 섬이었습니다. 어쩌다가 제주도로 가게 된 이들은 사용하는 언어와 먹거리가 다른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했기에 쉽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제주에서 김만덕의 가족이 살았던 것입니다. 김만덕의 아버지는 육지를 오가면서 장사하던 제주 상인이었습니다. 제주산 물건을 육지로 나가 팔고, 육지에서 제주도에 필요한 물건을 사 와서 되팔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김만덕이 열한 살이었던 1750년 가을, 어린 만덕은 충격에 휩싸이고 맙니다. 전라도 나주에서 제주도로 배를 타고 돌아오던 만덕의 아버지가 거대한 풍랑을 만나 바다에서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로부터 1년 뒤, 만덕에게 또 하나의 비극이 찾아오고 맙니다.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쓰러진 만덕의 어머니가 시름시름 앓다가 숨을 거두고 만 것입니다. 그렇게 김만덕 삼 남매는 부모님을 모두 여의고 척박한 제주 섬에 고아로 덩그러니 남겨지고 말았습니다. 삼 남매 중 남자 형제 둘은 허드렛일을 돕는 일원으로 친척 집에 가게 되었고, 여자아이는 일손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졌기에 김만덕은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고작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만덕은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막막하고 또 너무나 외로웠을 것입니다.

 

신분 하락

비극적인 삶을 살던 그때, 만덕에게 손을 내민 이가 있었습니다. 갈 곳 없는 만덕에게 손을 내민 이는 바로 제주 기생이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일이 거의 없는 나이 든 기생, 퇴기로 그가 만덕에게 손을 내민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당시 퇴기는 자신의 노후를 돌봐줄 수양딸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의 눈에 만덕이 눈에 띈 것입니다. 또 당시 관청 소속 기생은 일을 그만두기 위해서는 자신의 뒤를 이을 기생을 세워야 했기에 퇴기는 만덕이 자신을 대신해 기생이 되어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퇴기의 수양딸이 되면 먹고사는 일은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크게 달라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분'이었습니다. 본래 김만덕의 신분은 부모님을 따라 양인이었으나 기생의 수양딸이 되면 새어머니 신분을 따라 천민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만덕은 신분 하락을 감수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당시 천민은 사회적으로 천대받으면서 모멸감과 수치심을 견뎌야 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천민이라는 신분이 자식에게 대물림되기에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누구도 천민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조선 시대 기생은 국가에 소속된 공노비로, 관아의 재산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김만덕은 당장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게 급선무였기에 천민이 되는 걸 감수하고 기생의 수양딸이 됩니다. 몇 년이 흘러 김만덕이 10대 후반이 됐을 무렵, 김만덕은 또 한 번 엄청난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관청 소속의 기생, '관기'가 된 것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모든 기생이 거주지 관청 명단에 등록되어 활동했기에 김만덕 역시 제주 관청 소속 기생으로 활동하게 된 것입니다.

 

상인으로서의 삶

김만덕은 나이가 들면 입지가 좁아지는 기생 일에 한계를 느끼고, 장사를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1700년대 조선은 한양을 중심으로 전국 곳곳에 큰 시장이 생기면서 상업이 크게 발달하고 있었습니다. 김만덕은 일반 여성보다 활동 폭이 넓었고 다양한 인맥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조선에서 여성이 장사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급변하는 조선의 분위기를 재빨리 감지하고, 상인이었던 아버지를 떠올리며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김만덕은 타의로 선택한 기생의 삶이 아닌, 자신이 직접 선택한 상인의 삶에 남은 인생을 걸어 보겠다고 다짐하며 용기 있게 장사의 세계로 뛰어들었습니다. 장사를 결심한 김만덕의 눈에 띈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제주를 오가는 상인들이었습니다. 김만덕은 그 상인들을 이용해 돈을 벌 수 있겠다고 판단하고,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교통의 요지인 포구 가까이에 상인들이 물건을 거래할 수 있는 점포를 세웠습니다. 그 점포에서 육지 물건을 들고 제주도로 오는 육지 상인들과 제주의 물건을 들고 육지로 나가는 제주 상인들이 서로 거래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조선 주막과 비슷하면서 조금 더 규모가 컸던 이 점포에서 김만덕은 상인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하고 먹을거리를 팔았을 뿐만 아니라 상인들을 서로 연결해 주고, 상거래를 중개하는 대가로 수수료를 받았습니다. 점포를 운영하면서 장사에 눈을 떠간 김만덕은 중계 수수료를 받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점포에 오는 상인들을 통해 시장 정보를 알아낸 뒤, 곧바로 육지에서 쌀을 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쌀값이 싼 가을에는 쌀을 사들여서 점포 창고에 저장해 두었다가 쌀이 귀한 봄에 비싼 값으로 팔았습니다. 그야말로 김만덕은 타고난 장사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