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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안중근 유년기, 세례명 '도마', 상하이로 떠난 이유

by 다시한번도전 2024. 7. 8.

상하이로 떠난 독립운동가 안중근
상하이로 떠난 독립운동가 안중근

 

독립운동가 안중근의 유년기

1879년 9월 2일,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에서 가슴과 배에 일곱 개의 사마귀가 있는 한 사내아이가 태어납니다. 아이의 부모님은 북두칠성의 정기를 받아 태어났다는 의미로 아이에게 '응칠'이라는 아명을 지어줬습니다. 이 아이의 본명이 바로 '안중근'입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무인 집안에서 태어난 안중근은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조마리아의 3남 1녀 중 맏아들로, 아래로는 두 살 어린 여동생 안성녀와 다섯 살 터울의 안정근, 열 살 터울의 안공근을 남동생으로 두었습니다. 장남 안중근은 다른 형제와 유독 남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집안의 무인 기질을 누구보다 강하게 물려받았다는 것입니다. 안중근 형제와 사촌들은 집안에서 유학자에게 '사서삼경'같은 유교 경전을 배웠는데, 안중근만은 이러한 글공부보다 말타기와 사냥을 즐겼다고 합니다. 안중근의 아버지도 이런 그의 태도를 나무라지 않았다고 합니다. 특히 사격 솜씨가 일품이었다고 합니다. 안중근은 어려서부터 뜻하는 바가 있으면 그 주장을 굽히지 않는 성격이었습니다. 안중근은 열여섯 살이 되던 해에 결혼을 했습니다. 상대는 황해도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한 살 연상의 규수 김아려였습니다. 그런데 결혼한 그해에 안중근은 예상치 못한 사건과 맞닥뜨립니다. 처음으로 전투에 참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 전투는 조선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참지 못하고 농민들이 들고 일어선 '동학농민혁명'이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동학의 물결이 안중근이 살던 황해도 지역까지 퍼졌고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황해도 지방 관리의 요청으로 동학농민군 진압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이에 안중근도 아버지를 따라 진압군으로 전투에 참전한 것입니다.

 

세례명 '도마'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후에 안중근과 그의 아버지는 몸을 숨겨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동학농민군과 맞설 때 안태훈이 농민군이 쌓아둔 곡식을 빼앗아 군량미로 활용했기 때문입니다. 동학농민군과 맞서 싸우던 병사들을 먹이기 위해 내린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데 동학농민혁명이 정리되자 고위 관료들이 그때 빼앗은 곡식을 내놓으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안태훈은 말도 안 되는 요구라 판단하고 곡식을 돌려주지 않았고, 그러자 곡식 주인이라 나섰던 고위 관료들은 조선 조정에 일러 안태훈을 반역 죄인으로 몰아가기까지 했습니다. 위기에 몰린 안태훈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피신까지 해야 했습니다. 이때 안태훈이 피신한 곳이 지금의 명동성당, 당시 '종현성당'입니다. 성당은 외국인이 운영하는 종교 시설이었기 때문에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몇 달 뒤, 사건이 정리되니 다음에야 안태훈은 가족이 있는 청계동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청계동으로 돌아온 안태훈에게는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종현성당에서 몸을 피하는 동안 천주교의 교리에 감화되어 천주교를 믿게 된 것입니다. 안태훈은 위기의 순간에 자신을 도와준 천주교의 교리를 가족들에게도 열심히 전파했습니다. 이때 안중근 역시 천주교의 만민 평등사상을 접하고 모든 인간은 존엄하고 평등하다는 것을 깨달아 가슴 깊이 천주교를 받아들입니다. 천주교라는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신분제라는 틀에서 벗어나 평등하게 인간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서구의 역사와 가치, 문명을 알게 되면서 근대적 사고에도 눈을 뜨게 됩니다. 안중근의 호 '도마'는 이때 탄생합니다. 보통 '도마'를 한자라고만 생각하는데, 사실 도마는 안중근이 천주교 신자가 된 뒤에 받은 세례명입니다.

 

상하이로 떠난 이유

천주교를 통해 더 넓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안중근은 국내외 신문을 살피며 국제 정세의 변화를 파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중국 상하이로 이주하자는 의견을 아버지에게 제시했습니다. 1905년, 일제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했습니다. 나라에 충성하고자 한 안중근이 이 부당하고 치욕적인 현실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당연하게도 안중근은 대한제국을 침략하려는 일제에 저항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국내에는 이미 일제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데다가 무력의 차이도 너무 컸습니다. 그래서 안중근은 가족들과 함께 해외로 이주해 그곳에서 일제 침략에 맞서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킬 방법을 찾기로 한 것입니다. 갑작스러운 안중근의 제안에도 아버지 안태훈은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유학을 공부하고 무관을 배출한 안중근 집안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고 그 덕분에 안중근과 그의 아버지는 국가적 위기가 발생했을 때 생활 기반을 바꾸면서까지 나라의 위기를 돌파할 방법을 찾겠다고 결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와 상의를 마친 안중근은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상하이로 답사를 떠납니다. 그러나 상하이에 도착한 안중근은 생각지 못한 장벽에 부딪히게 됩니다. 상하이에서 힘이 있거나 잘 사는 동포들을 찾아다니며 나라를 구하기 위해 함께 나설 것을 설득했지만 아무도 안중근의 말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함께 힘을 모을 사람을 찾지 못한 것입니다.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 하나로 낯선 땅인 상하이로 떠난 청년 안중근은 동포들의 외면에 좌절한 채 수개월 만에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