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업가 정세권의 사업 시작배경
1920년 경성은 북촌까지 일폰인 판이 되어갔습니다. 이 모습을 두고 볼 수 없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경성에서 땅을 개발하고 집을 만들어 팔던 사업가 정세권이었습니다. 그는 요즘으로 치면 부동산 개발업자였고, 당대 최고 갑부이기도 했습니다. 정세권이 경성에서 사업을 시작한 건 서른두 살인 1920년부터였습니다. 그전에는 고향인 경상남도 고성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고성에서 면장도 지내고 동네를 위해 일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결혼 이후, 경성에서 사업을 하기 위해 가족을 데리고 경성으로 상경합니다. 경성에 도착한 정세권은 당차게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북촌 지역에 집을 짓는 회사를 세웁니다. 그 회사의 이름은 '건양사'로, 정세권이 경성이라는 도시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습니다. 정세권은 헌 집을 수리해 주고 돈을 받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이 사업이 잘되면서 건양사는 승승장구합니다. 1920년대 초에는 위기도 있었습니다. 경성 땅값이 비싸지고 건축비가 늘어나면서 건축 사업가들이 줄줄이 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정세권은 살아남았습니다. 시세에 맞게 건축비를 조절하는 지혜를 발휘해서 단 한 푼도 손해 보지 않고 건양사를 성공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승승장구하던 부동산 사업가 정세권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일이 생깁니다. 그는 조선 사람이 많아야 힘을 가질 수 있으니 일본이 조선인의 거리인 종로에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마디로 일본인들의 북촌 진출을 막아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이때 정세권은 자신이 잘하는 건 집 짓기이므로 북촌의 땅을 사서 조선인들을 위한 집을 지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도시형 한옥 마을
1920년대 후반, 정세권의 귀에 솔깃한 정보가 하나 들어왔습니다. 익선동이 매물로 나왔다는 정보였습니다. 익선동에는 왕실 종친이 대대로 살아온 누동궁이라는 궁이 있었는데 친일파 왕족 이해승이 그걸 팔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정세권은 곧바로 땅을 사들였습니다. 사들인 땅에 정세권은 한옥을 짓고자 했습니다. 1920년대 경성에는 크게 세 가지 유형의 집이 있었습니다. 일본식 주택, 서양식 주택인 문화주택, 그리고 조선식 주택인 한옥이었습니다. 그중 제일 인기가 많은 건 서양식 문화주택이었습니다. 문화주택은 화장실과 부엌을 내부로 넣은 서양식 집이라 편리성이 높아 인기가 많았습니다. 특히 이완용 등 돈 있는 친일파와 지주들이 선호했습니다. 하지만 정세권은 한옥을 짓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정세권은 당장의 돈벌이보다 조선인의 전반적인 생활개선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자보다 중류층이나 서민층 조선인을 대상으로 부동산 사업을 해나갔고, 그들이 살던 방식에 맞춰 한옥을 짓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문화주택과 비교해 값이 저렴하고, 조선인의 생활 방식을 버릴 필요도 없는 게 한옥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큰 고민거리가 하나 생겼습니다. 전통 한옥은 건물 여러 채가 집 한 채를 이루는, 넓은 땅을 차지하는 형태였습니다. 전통 한옥을 짓는다면 한정된 땅에 많은 한옥을 지을 수 없었고 많은 조선인이 살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세권은 넓은 땅을 작게 쪼개어 작은 땅에도 지을 수 있게 개량한 한옥, 이른바 '도시형 한옥'을 지었습니다. 그는 도시형 한옥을 건축한 1세대 개발업자였습니다.
조선물산장려운동
도시형 한옥을 지어 조선인들에게 보급하고 할부 거래까지 도입하면서 정세권의 사업은 더욱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때, 그에게 뜻밖의 위기가 닥쳤습니다. 일본 경찰이 정세권을 소환한 것입니다. 일본 경찰은 그가 독립운동했다며 추궁했습니다. 일본 경찰이 이러한 추궁을 한 이유는 신문에 실린 정세권의 사진과 그의 가족사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진 속 정세권은 한복을 입고 있습니다. 이렇듯 정세권은 평소에도 한복을 입고 다녔고 가족들에게도 되도록 한복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어처구니없게도 이 한복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것도 '광목'으로 만든 한복을 입고 다닌 게 더 문제였습니다. 광목은 목화에서 실을 뽑아서 베를 짠 후에 삶은 옷감으로, 조선 회사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정세권은 조선 사람이 만든 '광목'으로 만든 한복만 입고 다녔고 조선 물건을 알리고 조선 물건을 쓰자고 말하며 다녔습니다. 이를 '조선물산장려운동'이라고 합니다. 1920년대, 조선에는 값싼 수입 물건들이 물밀듯이 들어왔습니다. 일본 물건에 붙었던 관세가 없어지면서 값싼 일본 물건이 쏟아져 들어온 것입니다. 일제는 경복궁에서 자신들의 물건을 홍보하는 조선박람회를 열기까지 했습니다. 이때 광화문은 조선박람회 입구로 사용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조선인이 만든 기업들은 경쟁력을 잃고 도산할 위험도 커졌습니다. 이에 조만식 같은 독립운동가도 주도해 '조선 사람 조선 것'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일종의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평양에서 시작된 이 캠페인, 조선물산장려운동은 조선 기업이 만든 물건을 써 달라는 광고도 할 정도로 활발히 전개되었습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조선물산장려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정세권은 물산장려운동회관 건축도 맡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