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의자왕의 업적
의자왕은 백제의 마지막 왕입니다. 즉, 의자왕이 백제의 멸망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백제의 새로운 부흥기를 이끌었던 왕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나가는 전쟁마다 승리를 거둔 정복 군주이기도 했습니다. 의자왕이 백제의 31대 왕으로 즉위하던 641년, 이 시기는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가 국경을 맞대고 싸우던 혼돈의 시대였습니다. 특히 백제가 가장 경계하던 나라는 신라였습니다. 의자왕은 즉위 초부터 신라를 노리고 치열하게 공격했습니다. 백제에게 신라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복수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642년, 의자왕은 왕으로 즉위한 지 1년 4개월 만에 신라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직접 전장에 나섭니다. 그리고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간 첫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경상남도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 서쪽의 미후성을 비롯해 무려 40여 개에 이르는 성을 함락한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성과인지는 한국 역사의 대표적인 정복 군주라 할 수 있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업적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광개토대왕이 평생에 걸쳐 백제에서 빼앗은 성의 숫자가 64개입니다. 그런데 의자왕은 단 한 번의 전투로 40여 개의 성을 빼앗고 현재 경남지역을 석권해 신라를 압박한 것입니다. 성마다 규모가 다르고 그 이외에도 여러 차이가 있을 것이기에 단순 비교는 어렵겠지만,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왕이 거둔 성과로는 분명 엄청난 결과였습니다. 의자왕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신라에게 공포를 안겼습니다.
신라를 향한 원한
삼국이 접전을 벌이던 시대에 백제는 신라만 집중적으로 공격했습니다.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지리적 위치보다 더 중요한 까닭이 있었습니다. 가문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복수심 때문이었습니다. 신라에 대한 백제의 원한은 무려 의자왕의 4대조 할아버지 때 생긴 것으로, 그 시작은 나제동맹에서 출발합니다. 신라의 '나'와 백제의 '제', 즉 신라와 백제가 맺은 동맹을 나제동맹이라고 합니다. 의자왕 시기에 백제와 신라는 앙숙 관계였지만, 그보다 200여 년 앞선 433년에는 서로 동맹을 맺을 만큼 돈독했습니다. 사실, 두 나라가 가깝게 지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고구려의 힘이 너무 강했기 때문입니다. 5세기는 고구려의 전성기였습니다. 고구려는 한강 유역 이남까지 진출해 한반도 영토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고구려의 장수왕은 남진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수도까지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겼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백제와 신라는 손을 잡고 고구려에 공동 대응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동맹 내용은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하면 백제가 출동해서 도와주고,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면 신라가 백제를 도와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강 유역을 탈환할 경우 신라는 한강 상류를, 백제는 한강 하류를 갖기고 했습니다. 그렇게 동맹을 맺은 지 약 120년이 지나서야 두 나라를 고구려를 공격했고, 한강 유역을 되찾았습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나제동맹이 깨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한강 유역 땅 전체를 탐낸 신라가 이 지역을 독차지하기 위해 백제를 배신한 것입니다. 동맹 내용과 달리 신라는 한강 하류까지 점령해 버립니다. 이로써 나제동맹은 깨지고 두 나라는 원수가 되었습니다. 신의를 저버린 행동에 백제는 복수를 다짐하게 된 것입니다.
태자 책봉이 늦어진 이유
왕이 되자마자 자기 능력을 보여주며 삼국에 존재감을 알린 의자왕은 백제 무왕의 적장자였습니다. 그런데 의자왕은 왕이 되기까지 긴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왕은커녕 태자가 되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의자왕이 태자가 된 것은 아버지인 무왕이 즉위하고 무려 33년이 흐른 뒤인 632년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의자왕은 30대 후반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태자는 다음 왕이 될 후계자이니, 왕조 국가에서는 국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태자 책봉을 서두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들이 있기만 하다면 왕이 즉위한 뒤 보통 3년에서 4년 안에는 태자로 책봉했습니다. 다만 태자를 결정하면 자기 자식을 태자로 만들려는 여러 왕비의 로비도 멈추기 때문에 때에 따라 상황을 고려해서 태자 책봉이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여러 상황을 고려한다 해도 의자왕의 경우는 이례적으로 너무나 길었습니다. 검증대 위에 33년이나 있었던 것입니다. 서자 출신도 아닌데 그렇게 뒤늦게야 비로소 태자로 책봉되었으니 이런 일이 드물기도 하며, 당시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의자왕이 이렇게 늦게 책봉된 이유는 그의 태자 책봉을 방해한 인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의자왕에게 왕위를 두고 다툰 경쟁자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존재는 바로 사탁왕후의 아들입니다. 사탁왕후는 의자왕이 장성한 뒤 무왕이 새로 맞이한 아내입니다. 사탁씨는 백제의 대표적인 귀족 가문 8곳 중 하나로, 그중에서도 가장 힘이 센 집안이었습니다. 사탁왕후는 무왕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당연히 자기 친아들이 왕이 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의붓아들을 견제했을 것입니다. 학계에서도 계모인 사탁왕후가 견제하는 바람에 의자왕이 뒤늦게 태자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의견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