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의 유년기
조선 제21대 왕 영조가 42살이 되던 해, 사도세자가 태어났습니다. 조선 왕들의 평균 수명이 47세인 것을 감안했을 때 무척 늦은 나이에 아들을 얻은 셈입니다. 사도세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었습니다. 영조에게 이 늦둥이 아들이 더욱 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또 있습니다. 이미 한 번 아들을 떠나보낸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조가 25살에 얻었던 첫아들 효장세자는 10살이 되던 해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뒤 오랜 시간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었는데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이 태어난 것입니다. 영조가 첫아들을 잃은 지 7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기쁨이 컸던 영조는 아들이 태어난 지 불과 15개월 만에 어린 아들을 세자에 책봉했습니다. 사도세자는 역대 최연소 세자가 되었습니다. 돌이 막 지났을 무렵, 겨우 2살의 나이로 차기 왕에 낙점된 것입니다. 영조는 세자 책봉과 동시에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관청인 세자시강원을 꾸렸습니다. 그리고 사도세자가 3살이 되자마자 본격적인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정규 수업인 서연을 열어서 효의 도리를 가르치는 '효경'과 유학의 입문서라고 할 수 있는 '소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잘 가르친다 한들 3살짜리 아이가 그 뜻을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영조는 늦둥이 아들을 똑똑한 왕으로 육성하기 위해 총력을 다했습니다. '영조실록'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비단과 무명을 보면서 비단은 사치스러운 것이고, 무명은 검소한 것이라고 구분했다고 합니다. 그런 다음, 자신은 검소하게 무명옷을 입겠다고 해서 영조는 물론 신하들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사도세자는 유년기 시절에 아버지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이른 세자 수업을 들으며 영특함을 뽐냈습니다.
아버지가 집착한 이유
똑똑하게 자라나는 사도세자를 보면서 영조의 기대 또한 올라갔습니다. 자녀가 똑똑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영조는 바람을 넘어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바로 자신의 결점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은 자신과 달리 약점이나 흠결이 없는 완벽한 왕이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영조의 어머니는 여느 왕들의 어머니와 달랐습니다. 숙종의 후궁이 되기 전에는 무수리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무수리는 궁녀들의 시중을 드는 여종으로 온갖 허드렛일을 하는 천민입니다. 조선 왕 27명 중에 천민의 피가 흐르는 왕은 단 1명, 오직 영조뿐입니다. 어머니의 출신이 비천하다는 사실은 영조의 치명적인 단점이었습니다. 영조의 두 번째 단점은 평생 그를 따라다닌 의혹이었습니다. 바로 이복형이자 선왕이었던 경종을 없앴다는 것입니다. 원래부터 몸이 안 좋았던 경종이 입맛을 잃어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자, 영조는 이복형을 위해 입맛을 돋우는 간장게장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간장게장을 먹은 경종이 얼마 후에 죽고 말았습니다. 뒤를 이어 즉위한 영조는 간장게장으로 형을 독살하고 왕이 되었다는 의심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두 가지 단점을 안고 왕위에 오른 영조는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로는 탕평비와 탕평책이 있습니다. 그런 영조가 바라는 후계자는 힘들게 만들어놓은 왕권을 잘 유지할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대리청정
1749년,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기로 했습니다. 여느 때처럼 정사를 돌보기 위해 자리를 잡은 영조 앞에 사도세자가 앉았습니다. 영조는 대신들에게 대리청정을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대리청정이란 임금 대신 정사를 돌보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말합니다. 왕이 병들거나 나이가 들어 정사를 제대로 돌볼 수 없을 때 왕의 공식 후계자가 나랏일을 하는 것입니다. 당시 영조의 나이가 환갑에 가깝기는 했으나 건강한 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살인 세자를 앞에 세운 이유는 아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고자 함이었습니다. 사도세자가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다른 아들이 없으니 차기 왕은 사도세자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조는 어떻게 해서든 사도세자를 훌륭한 군주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공부는 하지 않고 온갖 잡기에 빠져 있는 사도세자의 관심을 돌리고 정치 훈련도 시킬 겸 대리청정을 맡겼을 것입니다. 막상 시켜보면 잘할지도 모른다는 조금의 희망도 있었을 것입니다. 대리청정의 첫 안건은 방어 기지를 옮기는 군사 문제였습니다. 성진에 위치한 방어 기지를 다시 길주로 옮기자는 이야기를 꺼낸 사람은 영의정이었습니다. 현재 함경북도 김책시에 해당하는 성진 땅에 방어 기지가 있었는데, 그것을 위쪽에 있는 길주로 옮기자는 것이었습니다. 좌의정도 이에 동의했습니다. 국경지대인 북방에서 내려오는 적들을 막을 때, 성진에 비해 길주가 더 수월하다는 이유였습니다. 사도세자는 대신들에게 우려되는 바를 물은 뒤 답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영조는 사도세자의 결정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무슨 결정을 할 때마다 사도세자를 꾸짖었습니다. 사도세자는 아버지의 눈치를 보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