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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 왕위와 가정사, 이시애의 난, 우상

by 다시한번도전 2024. 8. 10.

예종의 모습
예종의 모습

 

예종의 왕위와 가정사

예종은 1468년에 19살의 나이로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그때 8세인 아들이 있었답니다. 예종은 세자였던 1460년에 11세의 나이로 한명회의 딸인 장순왕후 한 씨를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혼인한 다음 해인 1461년에 아들 인성대군을 낳았던 것입니다. 즉, 12세의 소년이 아버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로써 조선의 왕 중 최연소 아버지가 탄생합니다. 오늘로 치면 초등학교 4학년의 남자 어린이가 아이를 낳은 겁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냐는 의문이 들 것입니다. 아마 왕자라서 영양 만점인 음식들을 골고루 잘 섭취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찍이 몸이 조숙했던 게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하지만 아들을 낳은 장순왕후 한 씨는 산후병으로 사망하고, 아들인 인성대군 역시 3세의 어린 나이로 풍질을 앓다 죽게 됩니다. 이후, 예종은 두 번째로 맞이한 아내, 안순왕후를 통해 아들 제안대군을 얻습니다. 조선의 임금은 총 27명입니다. 이 중에는 많은 사람에게 익숙하지 않은 왕이 몇 명 있습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예종입니다. 예종은 재위 기간이 1년 3개월밖에 되지 않는 데다 교과서에서 거론되는 주요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게다가 세조 때 일어난 계유정난 이후 형성된 원훈세력과 이시애의 난 이후에 성장한 세력의 갈등이 심해져 나라가 어지러웠습니다. 따라서 안정적인 왕위를 지켜나가기 어려웠습니다.

 

이시애의 난

위에서 언급한 이시애의 난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이시애의 난은 세조 말년인 세조 13년에 일어난 대규모의 반란을 말합니다. 세조는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함경도 출신 수령의 임명을 제한하고 대신 한양 출신으로 대체했습니다. 그리고 조선판 주민등록증인 호패법을 강화하여 지방민의 이주를 금지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지방에 사는 지주들에게 사또도 못 하게 하고, 한양으로 이사도 못 하게 한 것입니다. 당시 이시애는 함경도 출신의 유력자였습니다. 당연히 세조의 이러한 지방 압박이 맘에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로 치면 세조는 지역감정이 심한 리더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시애가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동시에 세조의 측근인 '한명회와 신숙주가 반역을 꾸미고 있다'라는 소문도 퍼뜨렸습니다. 이를 듣고 놀란 세조는 한명회와 신숙주를 옥에 가둬버렸습니다. 이런 가운데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왕족 출신인 구성군과 젊은 군인 출신인 남이입니다. 이시애의 난 이후 성장한 젊은 세력들을 '신공신'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한명회와 신숙주 등 기존 세조의 측근이었던 세력을 '구공신'이라 부릅니다. 구공신과 신공신의 갈등을 조정하고 어린 왕을 염려한 세조가 원상제를 실시했습니다. 원상제란 어린 임금이 즉위했을 때, 재상들이 임금을 보좌하는 것입니다. 당시 한명회와 신숙주 등이 예종을 보필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신하의 권력이 강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왕권이 그만큼 위협받는 것을 뜻합니다.

 

예종의 우상

예종이 즉위할 당시에는 위와 같은 상황 때문에 신하들의 권력이 강하고 왕권은 자칫 약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예종은 비록 19세의 나이로 어렸지만 강력한 군주였던 아버지를 닮고 싶어 합니다. 자신의 우상이 자신의 아버지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처럼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려고 합니다. 예종의 아버지 따라 하기는 세조의 묘호를 정할 때 여실히 드러납니다. 묘호란 황제나 왕이 죽은 후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붙이는 이름입니다. 이때, 구공신들은 세조의 묘호를 '신종'이라 올렸습니다. 하지만 예종은 세조라는 묘호를 고집합니다. '조'는 나라를 세운 왕에게 올리는 이름이기 때문에 사실상 세조라는 이름은 쓸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종이 끝까지 고집한 덕분에 '계승한 왕'이라는 의미의 '세'와 '나라를 세운 군주'라는 의미의 '조'라는 최고의 묘호를 받게 된 것입니다. 구공신들이 올린 '신종'을 거부하고 '세조'라 결정한 것은 더는 임금이 구공신의 이야기를 듣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종은 아버지 세조를 닮고 싶었고, 강력한 군주로서의 면모를 어필해 신하들의 세력을 꺾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예종의 의지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예종은 젊은 나이로 승하합니다. 예종에게는 고질병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발에 생기는 병인 족질입니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났던 음력 11월 28일 이전의 기록을 보면 족질이 죽을 만큼 심각했던 건 아닌 걸로 보입니다. 실록에서는 예종의 죽음이 매우 갑작스러운 것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