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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 생애와 출신, 한산대첩, 왕 '선조'의 의심

by 다시한번도전 2024. 7. 5.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

 

이순신 장군의 생애와 출신

이순신은 1545년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정은 농촌에서 소박하게 살았으며, 가난한 환경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이러한 가난과 어려움은 그의 인내와 군사적 능력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순신은 어린 시절부터 열심히 일하고 학습하는 데에 전념했으며, 이는 그의 나중 군사 경력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순신은 예산 지역에서 성리학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는 윤관 등의 성리학자로부터 직접 교육을 받으며, 성리학의 철학적 가르침은 그의 국가와의 본분에 대한 이해를 깊이 있게 키워주었습니다. 또한, 이순신은 예산 지방에서의 체험을 통해 인내와 끈기를 배우게 되었고, 이는 나중에 전쟁터에서의 업적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순신의 군사 경력은 청나라와의 국경지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조연을 맡아 실전 경험을 쌓았으며, 뛰어난 전략과 능력으로 인해 조선 정부에서 급속히 승진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는 조선의 국익을 수호하기 위해 여러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며, 그의 전쟁 전략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순신은 명량해전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투에서도 그의 전략적 통찰력과 지휘력을 발휘하며 역사에 길이 남을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그의 출신지에서부터 시작된 겸손하고 굽히지 않는 자세와 뛰어난 전략적 사고력을 통해 조선의 역사에 큰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의 교육과 군사 경력은 나중에 이룬 위대한 업적들의 기초가 되었으며, 그의 생애는 오늘날에도 많은 연구와 감탄을 받고 있습니다.

 

한산대첩

1592년 7월 7일, 거제와 고성 사이에 있는 견내량에 일본군의 배 70여 척이 모여듭니다. 견내량은 굉장히 좁은 해변으로 암초까지 많다 보니 배끼리 부딪힐 위험이 큰 곳이었습니다. 견내량의 특성을 미리 알았던 이순신 장군은 견내량이 아닌 한산도 앞의 넓은 바다에서 전투를 벌일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배 대여섯 척으로 구성된 미끼 조를 투입해 적을 한산도 인근 바다로 유인했습니다. 앞을 가로막는 조선 배를 쫓아 일본 함대가 한산도 앞바다로 들어선 그때 좌우에서 기다리고 있던 조선 수군의 배가 세 개의 부대로 나뉘어서 등장했습니다. 마치 학이 날개를 펼친 듯한 모습 같다고 해서 '학익진'이라 불리는 진형이었습니다. 일본 함대를 완전히 포위한 조선 수군은 무차별 포격을 시작했고 일본은 제대로 된 반격도 하지 못하고 배 73척 중 58척이 침몰당하는 피해를 보았습니다. 이순신은 뒤따라 출격한 일본 함대까지 격파하면서 총 100여 척에 달하는 대함대를 3일 만에 불태워 없애는 역사상 유례없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전투가 잘 알려진,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로 손꼽히는 '한산대첩'입니다. 한산대첩은 단순한 해상전이 아니었습니다. 넓은 바다에서 학익진을 펼칠 정도로 조선 수군이 잘 훈련되어 있었다는 증거이자 기동전술과 포격술이 어우러진 승리였습니다. 해상에서 포위섬멸전을 이 정도로 정교하게 선보인 전투는 세계 해전사에서도 드물기 때문에 전 세계에서 손꼽힐 만한 해전입니다. 해상 전투에서 이순신을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군에 해전 금지 명령을 내립니다. 한산대첩 이후 일본군은 더 이상 바다로 진출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왕 '선조'의 의심

한산대첩 등 해전에서의 전공을 인정받아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승진합니다. 전라, 충청, 경상 삼도의 수군을 통솔하는 자리로, 한마디로 조선의 수군 총사령관이 된 것입니다. 선조 또한 이순신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에 맞는 대우를 해준 것입니다. 왕에게도 인정받고 백성에게도 사랑받으며 이순신의 명성은 나날이 드높아졌습니다. 바다에서 이순신의 승전보가 울리고 일본군의 보급로가 끊기자 육지의 전세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계속된 패배로 사기가 땅에 떨어졌던 조선 육군도 다시 힘을 내 싸웠고 전국 각지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어난 의병의 활약도 이어졌습니다. 이 무렵 일본이 조선을 점령하고 명나라까지 올라오는 사태를 막기 위해 명나라도 조선에 군대를 보내 일본군과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을 시작한 지 1년 만에는 빼앗겼던 한양도 되찾았습니다. 이제 전쟁의 양상이 바뀌고 희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일본군의 해전금지령이 길어지던 어느 날, 선조는 이순신이 어느 순간 전투를 게을리한다는 말을 던집니다. 임진왜란 초반 1년 이후부터 이순신 부대가 거둔 성과가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순신은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가 없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군에 내린 해전금지령 때문에 일본 수군은 이순신의 수군을 철저히 피해 다녔기 때문입니다. 이순신은 수시로 전쟁 상황을 조정에 보고했지만 선조는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 초기에는 희망적인 승전보를 울리던 이순신이 게으름을 피우며 싸우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순신의 보고에는 눈과 귀를 닫고 오히려 괘씸하게만 여겼습니다. 이순신에 대한 큰 기대가 오히려 독이 된 결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