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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전쟁의 기록, 두 번째 침략, 조선 사기장

by 다시한번도전 2024. 8. 1.

임진왜란 전쟁의 기록
임진왜란 전쟁의 기록

 

임진왜란 전쟁의 기록

임진왜란은 임진년에 '왜', 즉 일본이 일으킨 난이라는 뜻입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일본은 명나라를 정벌하러 가겠다며 조선에 길을 내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명나라와 사대관계였던 조선은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길을 내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빌미로 조선을 침략했습니다. 임진왜란은 일본이 조선을 발판 삼아 명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큰 해를 입는 것은 백성들입니다. 그중에서도 힘이 약한 여성과 아이들입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이자 일본의 최고 권력자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대기를 다룬 '에혼 다이코기'에는 임진왜란에 대한 이야기와 전쟁의 참혹함을 알 수 있는 삽화가 담겨 있습니다. 그림 속에는 쓰러져 있는 여인이 있습니다. 이 여인은 이미 목숨을 잃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아이는 엄마가 죽은 줄도 모르고 배가 고파 엄마의 젖을 찾고 있습니다. 차마 그 과정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가린 채 슬퍼하는 사람, 놀라서 달려오는 사람도 그려져 있습니다. 이렇듯 일본의 침략은 조선 곳곳을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일본의 기세는 강했습니다. 조선이 맥없이 당하기만 하자 명나라에서도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왜군이 명나라까지 올 수 있겠다는 위험을 감지한 명나라는 조선에 구원병을 보냈고, 왜군에게 한양까지 빼앗겼던 조선은 꼬박 1년이 지나서야 수도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전쟁의 포화가 휩쓸고 지나간 한양의 모습은 '징비록'에 생생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징비록'은 당시 전쟁 수행 책임자 가운데 가장 높은 직책을 가지고 있었던 류성룡이란 인물이 쓴 글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한양은 여기저기 죽은 이들의 시체로 가득했고,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몰골도 산 사람 같지 않았다고 합니다.

 

두 번째 침략

1592년 일본이 처음 조선에 쳐들어온 목적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1597년 두 번째 침략은 달랐습니다. 조선 그 자체가 목적이었습니다. 오랜 전쟁으로 당시 왜군의 사기는 이미 바닥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냥 물러선다면 지는 싸움을 위해 막대한 돈과 병사를 쏟아부은 셈이 되니, 조선 땅에서 무엇이든 얻어가려 한 것입니다. 일본은 조선 남부 지역을 점령하고 자원을 약탈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무자비하게 공격하면 조선도 항복할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때 일본의 주요 타깃은 바로 '조선인' 그 자체였습니다. 사람을 잡아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왜군은 잡아간 조선인을 짐승 취급했습니다. 소나 말처럼 다루며 짐을 나르게 했는데, 그 정도가 지나쳐서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일본이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을 잡아갔는지, 조선인 노예가 시장에 쏟아지자 전 세계 노예시장의 시세가 예년의 6분의 1 수준으로 하락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탈리아의 중계 무역상으로 '나의 세계 일주기'를 쓴 프란체스코 카틀레티는 '조선인 노예 5명을 포르투갈 화폐 단위로 겨우 12 스쿠도면 손에 넣을 수 있었다'라고 했습니다. 당시 아프리카 노예 1명이 170 스쿠도에 거래됐으니 조선인들이 얼마나 헐값에 팔렸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정확히 집계된 기록은 없지만, 그때 잡혀간 조선인 포로는 약 10만 ~ 20만 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임진왜란이라 하면 동아시아 3국 즉, 조선, 일본, 중국의 싸움이라 생각하지만 이처럼 세계적으로도 영향을 준 것입니다. 일본이 조선인을 많이 잡아간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일본 내부의 부족한 노동력을 노예로 채우기 위해서였고, 또 다른 하나는 부족한 군비와 자금을 보충할 자원으로 쓰기 위해서였습니다.

 

 

애통한 나날을 보낸 조선 사기장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중에는 사기장도 있습니다. 사기장들은 영주에게 대접받기도 했지만, 괴롭게 살다 간 사기장들이 더 많았습니다. 영주들은 조선인 사기장들을 모아 조선인 마을을 꾸렸습니다. 돈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조선인 사기장들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같았습니다. 영주들은 점차 이들의 삶을 철저하게 통제하기 시작했습니다. 돈이 되는 도자기 기술이 다른 지역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 삶은 대를 이어서 계속되었습니다. 허허벌판에 던져진 사기장들은 황무지를 개간하고 가마터를 만들어야 했을 것입니다. 어떤 영주들은 먹을 것도 제대로 챙겨주지 않았습니다. 조선인 사기장들은 굶주림에 허덕이고 병마와 싸워야 했습니다. 그들은 그릇을 만들어 근처에 사는 일본인들이 내놓는 생필품과 맞바꿔 생계를 이어갔다고 합니다. 낯선 땅에 끌려와 숨이 막히는 감시 속에서 살아야 했던 사기장들은 조선을 그리워했습니다. 조선인 사기장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은 산골짜기에 숨어 있는 아주 작은 마을인 '오카와치야마'입니다. 이 마을에는 기묘한 탑 하나가 있는데, 탑을 이루고 있는 돌은 다름 아닌 조선인 사기장들의 묘비입니다. 이름도 남기지 못한 많은 조선인 사기장의 묘비는 원래 마을 곳곳에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1938년, 사연을 듣고 안타깝게 여긴 한 스님이 880개의 묘비를 모두 모아 탑으로 쌓았습니다. 임진왜란이 1598년에 끝났으니, 무려 340년의 세월 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셈이었습니다.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죽기 전까지도 조선을 그리워했을 사기장들은 지금도 이름 없이 타국 땅에 묻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