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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이봉창 어린 시절, 땅을 빼앗긴 이유, 생계를 위한 선택

by 다시한번도전 2024. 7. 10.

땅을 빼앗긴 조선인 이봉창
땅을 빼앗긴 조선인 이봉창

 

조선인 이봉창의 어린 시절

1901년 8월 10일, 이봉창은 지금의 서울 용산구 효창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봉창의 출생 배경은 당시 사회에서 보기 드문 신흥 부자 가정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의 아버지 이종룡은 건축업과 운송업을 통해 상당한 부를 축적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이봉창의 가정은 근방에서 이름만 들어도 알 만큼 유명한 부잣집으로 알려졌습니다. 어린 이봉창은 이러한 환경에서 자라면서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봉창은 지금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소학교에 다녔습니다. 그의 집안 배경 덕분에 학교에서도 특별한 관심을 받았습니다. 선생님들은 물론, 친구들까지도 이봉창을 특별하게 대했습니다. 그는 학업에서도 주목받았으며, 선생님들로부터 많은 기대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환경은 이봉창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그의 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이봉창이 열 살이 되던 1910년, 그의 삶은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1910년 8월 22일,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압해 한일병합조약을 체결시켰습니다. 이 사건은 이봉창의 유년기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고 단 일주일 만에 대한제국은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을 경술국치라 부르며, 이는 조선인들에게 커다란 충격과 절망을 안겨주었습니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면서 조선의 교육 체계도 급격하게 변화했습니다. 학생들은 더 이상 한국의 역사가 아닌 일본의 역사를 배우게 되었고, 한국어가 아닌 일본어를 배워야 했습니다. 어린 소년 이봉창도 이러한 변화의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 그는 식민지가 된 조국의 현실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며, 자신의 정체성과 민족의식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땅을 빼앗긴 이유

경술국치는 이봉창의 집안에도 엄청난 타격을 주었습니다. 갑자기 이봉창의 아버지가 쓰러지며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 때에 엎친 데 덮진 격으로, 이봉창 집안이 소유하고 있던 집과 땅마저 대부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집안이 풍비박산 난 것입니다. 이 모든 게 경술국치와 관련이 있습니다. 한일강제병합 이후 식민 통치의 경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은 대대적인 토지 조사 사업을 벌였습니다. 일본은 땅 주인에게 토지 소유권을 나눠주겠다며 집집마다 가진 땅을 신고하라고 했습니다. 그 내막에는 일본이 조선의 토지를 샅샅이 조사한 다음, 조선의 토지를 근대식으로 정비하겠다는 명목으로 조선인들에게 세금을 거두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토지 조사 사업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토지 신고에 필요한 문서를 작성하는 방법이 너무 어려워서 신고하러 갔다가 포기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이봉창 집안이 땅을 빼앗긴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일본인이 토지 신고를 도와주겠다며 이봉창의 아버지에게 접근해 왔습니다. 이봉창의 아버지는 그 말을 믿고 집문서를 몽땅 맡겨 버렸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일본인은 사기꾼이었고 집문서를 담보로 은행에서 돈을 빌린 후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용산의 이름난 부자였던 이봉창의 집안은 모든 것을 잃고 순식간에 빈털터리가 되어 산동네로 이사 가야 했습니다.

 

생계를 위한 선택

막대한 재산을 잃고 생계까지 막막해진 상황에서 열다섯 살이 된 이봉창은 큰 결심을 하게 됩니다. 상급 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돈을 벌기로 한 것입니다. 이봉창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본인이 운영하던 과자점에 취직합니다. 경술국치 이후 용산 일대에는 대규모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이 지역에 일본인 집단 주거지와 상권이 들어섰습니다. 점차 일본인들의 영역도 넓어졌습니다. 이봉창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도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의 거주지와 상권을 잠식하고 있었으니 이봉창이 일본인 가게에서 일하게 된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봉창은 과자점에서 2년 정도 일한 다음, 약국으로 일자리를 옮겼습니다. 일을 하면서 깜짝 놀랄만한 특기도 하나 생겼습니다. 이봉창이 스스로 조선인이라고 밝히지 않으면 일본인으로 착각할 정도로 완벽한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봉창은 다른 능력 또한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그건 바로 누구와도 금세 친해질 수 있었던 친화력이었습니다. 내세울 학벌도, 기술도 없던 이봉창은 수준급의 일본어 실력과 특유의 사교성을 무기로 성실하게 일하며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어느덧 이봉창이 열아홉 살 청년이 된 1919년, 그해 3월 1일에 만세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서울에서 시작된 3·1 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졌고, 목이 터지라 외치는 만세 물결은 국내를 넘어 해외까지 이어졌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운동에 참여했지만, 이봉창은 생계를 꾸리느라 만세 시위에 나서지 못했습니다. 일본인 가게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니 더욱 쉽지 않은 입장이었습니다. 세상사에 눈 돌릴 틈도 없이 이봉창은 하루하루를 버티며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에 매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