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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환관 가족을 이루는 방법, 환관제도의 양면성, 김처선

by 다시한번도전 2024. 7. 31.

가족을 이룰 수 있었던 조선환관
가족을 이룰 수 있었던 조선환관

 

조선환관이 가족을 이루는 방법

조선시대에는 환관을 내시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내시와 환관을 구별하던 고려 시대와 다른 점입니다. 환관은 '벼슬을 관리하는 관리'라는 뜻과 '생식기능이 제거되어 남성성을 상실하고 관직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조선시대 환관은 가족은 물론이거니와 족보까지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1805년에 처음 만들어진 '양세계보'는 고려말 조선 초 내시였던 윤득부를 시조로 하는 환관 가문의 족보입니다. 3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에는 총 650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선 제21대 왕 영조 때의 환관 이경희를 중심으로 구성된 가계 족보를 살펴보면, 이경희의 이름 아래 칸에 장자 명주국, 차자 최광국의 이름이 있습니다. 명주국의 아들은 양달엽이고, 양달엽의 아들은 김양복, 최광국의 아들과 손자는 유인묵과 임의복입니다. 보통 족보라고 하면 같은 성씨의 가계를 기록한 것인데, 특이하게도 '양세계보'에 실린 아버지와 아들은 성씨가 다릅니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환관들은 다른 성씨의 자식을 입양해 대를 이어 나갔기 때문입니다. 가족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조선 시대 환관들이 누린 가장 큰 혜택이었습니다. 환관은 결혼해서 아내도 들일 수 있었고 아이도 입양할 수 있었습니다. 족보도 만들어 전할 만큼 나라에서 환관 가족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습니다. 환관들은 보통 한두 명의 양자를 들였는데, 부자이거나 권세가 있으면 네다섯 명의 양자를 두기도 했다고 합니다. 성이 같지 않아도 되니 먹고살기 힘든 집안에서 아들을 양자로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양자가 되면 양아버지를 통해 기본 교육을 받으니 보다 순조롭게 환관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자기 양자에게 직책이나 권력을 대물림하면서 환관은 가문을 이루었습니다.

 

 

조선시대 환관 제도의 양면성

환관이 가족을 만드는 것을 나라가 인정해 준 이유는 제사 때문이었습니다. 유교에서는 조상을 모시는 일을 무척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후손이 중요했습니다. 환관은 생물학적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으니 죽은 뒤 제사를 지내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양자를 들여 가계를 잇고 대대로 조상을 모시도록 허용한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환관의 수급 문제였습니다. 중국에는 궁형이라는 형벌이 있었지만, 조선에는 그와 같은 형벌이 없었기 때문에 형벌로 거세시켜 환관의 수를 채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왕실 입장에서는 환관은 계속 필요한 존재였기에 환관이 양자를 들이게 함으로써 그 아들도 환관이 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환관을 안정적으로 수급하기 위한 방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환관 가족을 인정한 것은 환관 개인에게도 왕실에도 분명 좋은 의도였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이 의미는 퇴색되기도 했습니다. 박한종처럼 왕의 권력을 등에 업고 아들에게 부정과 부패를 대물림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박한종은 왕의 비호를 믿고 호가호위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환관의 한계인 종 2품을 뚫고 종1품까지 올라간 환관입니다. 1546년 명종 1년에 박한종은 내수사의 총책임장인 '내수사 제조'로 임명되며 박한종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고 합니다. 내수사는 조선 시대 왕실의 재정을 관리하던 기구입니다. 명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해 궁중 사정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환관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자연히 환관의 역할은 강화되고 힘이 세졌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환관의 부정부패는 결국 조선 왕조의 근간을 흔들리게 했고, 왕실과 백성들 사이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김처선

박한종처럼 권력과 재물을 노린 환관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진짜 소임을 다했던 환관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은 두려움 속에서도 연산군에게 쓴소리를 주저하지 않았던 김처선입니다. 김처선은 세종부터 연산군까지 무려 7명의 왕을 모신 환관입니다. 조선 시대 환관 중 가장 많은 왕을 모셨습니다. 연산군 때에 김처선은 환관의 최고 수장인 상선을 맡고 있었습니다. 상선은 왕의 곁에서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했으니, 김처선 역시 연산군이 어렸을 때부터 가까이 지냈습니다. 조선 제10대 왕이 된 연산군은 폭정을 이어갔습니다. 조선 시대 최악의 폭군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하지 않게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았고, 누구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죽여 없앴습니다.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말을 했다가는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알 수 없으니, 연산군 주위에 바른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처선은 연산군이 있는 궁궐로 향했습니다. 김처선은 연산군 앞에 나아가 바른말을 쏟아부었습니다. 김처선의 말을 들은 연산군은 끓어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었습니다. 왕의 수족인 환관이 감히 왕을 가르치려 든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연산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옆에 있던 활을 들고 활시위를 당겼습니다. 연산군이 쏜 화살은 김처선의 갈빗대를 맞추었습니다. 김처선은 연산군의 칼부림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김처선은 숨이 끊어질 때까지 충언했습니다. 비록 끔찍한 죽음을 맞았지만, 그의 최후는 비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권력의 최측근에서 권력에 저항한 대표적인 환관으로 떳떳하게 역사에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