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조선 세종대왕 업적, 아들의 결혼, 삼간택

by 다시한번도전 2024. 6. 30.

세종대왕 아들 문종의 결혼
세종대왕 아들 문종의 결혼

 

조선 세종대왕의 업적

조선의 제4대 왕인 세종은 오늘날 전 세계의 인정을 받은 우수한 글자 한글을 창제한 것을 물론이고, 집현전을 통해 인재를 발굴하여 학문을 장려했습니다. 세종대왕은 1420년대 중반부터 문화적 발전과 지식 증진을 위해 집현전을 설립하였습니다. 집현전은 '지식을 현대로 모으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학문적 활동을 지원하고자 설립되었습니다. 당시의 조선 사회는 학문과 지식의 중요성이 점차 부각되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세종대왕은 지식의 보금자리인 집현전을 만들어 학자들의 연구와 교육을 촉진하고자 하였습니다. 집현전은 주로 문헌 수집과 출판 활동을 중심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세종대왕은 전국 각지에서 문헌을 수집하여 집현전에 보관하고, 필요한 문헌들을 복사하여 출판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한글 문헌의 보존과 전파를 증진하며, 국가적 지식 기반의 강화를 목표로 하였습니다. 또 다른 세종대왕의 중요한 업적은 과학 기술 분야에서의 발전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은 천문 관측을 중요시하며, 천문학과 달력 제작을 통해 조선의 과학 기술 수준을 끌어올렸습니다. 특히 1433년, 향리단을 설립하여 자신이 직접 천문 관측을 시행하였으며, 천문학 연구의 중요성을 증명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조선의 농업 발전을 위해 새로운 농법과 수로를 개발하였으며, 이는 후세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각종 무기를 개량하는 등 국방에도 힘썼습니다. 문무를 가리지 않고 신경을 쓴 셈입니다. 정치와 문화 등 모든 면에서 빛나는 업적을 기려 우리는 그를 왕이 아니라 '대왕'이라고 부릅니다. 게다가 세종은 애민 정신이 남달랐던 왕으로도 유명합니다. 백성을 사랑한 그 마음이야말로 세종이 지금까지 성군이라 불리는 이유입니다.

 

아들의 결혼

1427년 4월 26일, 문무백관을 거느린 세종이 예복을 갖춰 입고 경복궁 근정전 앞에 나타났습니다. 근정전은 조선 시대에 왕의 즉위식을 비롯해 국가의 중대한 행사를 치르는 건물이었습니다.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그날의 경사는 왕실의 결혼으로, 주인공은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귀한 맏아들이자 조선의 왕세자인 문종이었습니다. 세종은 세자빈을 맞이하러 가는 세자에게 덕담과 훈계를 하기 위해 근정전에 나왔던 것입니다. 세종은 당시에도 백성들에게 성군으로 칭송받았습니다. 이런 왕의 아들, 그중에서도 세자가 결혼한다니 그야말로 나라의 경사였습니다. 그런데 이 결혼이 더 특별했던 까닭이 있습니다. 바로 문종이 세종의 적장자라는 것입니다. 태조에서 세종에 이르기까지 4명의 왕이 나라를 다스렸지만, 그중 적장자 출신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스스로 나라를 세운 건국 군주였고, 제2대 왕인 정종은 태조의 둘째 아들이었고, 제3대 왕 태종은 태조의 다섯 번째 아들이자 정종의 동생이었습니다. 뒤이어 왕이 된 세종 역시 태종의 적장자인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폐위된 후 형 대신 왕위에 오른 셋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종 때에 와서야 유교 종법에 따른 가계 계승 원칙, 즉 정통성 있는 적장자로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한 것입니다. 유교 이념을 따르는 조선에서는 굉장히 상징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 아들 문종의 결혼이니만큼 이 행사는 조선과 세종에게 특히 중요했습니다.

 

삼간택

간택은 여럿 중에 가려서 고른다는 뜻입니다. 삼간택은 말 그대로 왕실 사람들이 혼인할 때 그 배우자를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 총 세 번에 걸쳐 고르는 일을 말합니다. 간택 제도는 세종의 아버지이자 조선 제3대 왕인 태종 때 처음 만들어진 조선 왕실만의 독특한 혼례 풍습이었습니다. 특히 세자빈을 간택으로 뽑은 것은 세종이 처음이었습니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형식이 완전히 자리 잡힌 것은 아니었고, 조선 후기에야 비로소 세 번의 절차가 완성되었습니다. 왕실에서 혼례를 준비하는 첫 단계는 우선 국혼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전국에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세종이 그랬던 것처럼 혼기가 찬 처녀들의 혼인을 금지하는 금혼령을 내리는 것입니다. 금혼 대상의 연령대는 국왕이나 왕세자의 나이에 따라 조금씩 달랐지만, 대략 10세에서 15세 안팎의 처녀들이었습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처녀가 있는 집안의 어른은 일종의 지원서라고 할 수 있는 '간택 단자'를 조정에 제출해야 했습니다. 지원자의 정보는 두 줄로 정리되었습니다. 첫째 줄에는 '처자 홍 씨 년십세, 계유 칠월 초삼일 육시, 본관 남양'이라고, 둘째 줄에는 '부 승지 만식, 조 교관 순경'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자빈 지원자의 성과 나이, 생년월일시, 본관을 적고 그다음 줄에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관직과 이름을 적어 가문의 명성을 확인한 것입니다. 위쪽 여백에는 소론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습니다. 소론은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소속 정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간택 후보를 뽑을 때 집안의 명성뿐 아니라 정치 성향까지 고려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전국에서 올라온 간택 단자를 통해 30여 명의 후보를 추리면 길일을 잡아 날짜를 정하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삼간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