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어우동의 출신 배경과 본명
어우동은 한양에 사는 지체 높은 양반가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나라를 위해 특별한 공을 세운 공신 집안이었고, 아버지 박윤창은 지금으로 치면 외교부 국장급에 해당하는 승문원 지사까지 지내게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대단한 집안 출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박 씨입니다. 따라서 어우동의 성은 어 씨가 아니라 박 씨이고, 진짜 이름은 '박구마'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어우동의 본명 '박구마'로 불리지 않고 어우동이라고 불린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여성의 이름을 공적으로 부르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우동 또한 실제 이름이 아니라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던 별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우동의 미모는 당시에도 꽤 유명했습니다. 조선 전기 문신이나 학자 성현이 쓴 필기잡록 '용재총화'에도 어우동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필기잡록은 그 당시에 쓰인 일종의 잡담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저술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인물의 일화를 비롯해 사회문화 전반을 다루고 있어서 조선 전기의 역동성과 다양성을 읽어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습니다. 바로 이 잡담집에 어우동의 미모에 대한 이야기가 실린 것입니다. 좋은 집안과 재력, 미모까지 갖춘 어우동을 며느리로 들이고 싶어 하는 집안이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조선의 왕가였습니다. 태종 이방원에게는 아들이 11명이 있었는데, 중전인 원경왕후 민 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은 4명입니다. 그중 셋째 아들이 세종대왕이고, 둘째 아들이 효령대군입니다. 어우동의 남편감은 효령대군의 다섯째 아들 영천군의 서자인 태강수 이동이었습니다. 어우동은 왕족과 결혼하여 다시 한번 신분 상승을 하며 왕실의 종친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유감동 사건
유감동은 오늘날로 치면 서울특별시장에 해당하는 한성부 판윤의 딸이었습니다. 남편은 강원도 평강현을 다스리는 고을 원님이었습니다. 그녀 역시 어우동처럼 지체 높은 양반집 규수였습니다. 그녀는 남편에게 버림받은 뒤 40여 명의 남자와 만남을 이어갔습니다. 당시 조선 시대의 모든 형률은 명나라의 법전 '대명률'에 의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대명률'에는 간통죄를 어떻게 처벌해야 하는지도 정해져 있었습니다. 여기에 양반의 경우, 일반인과 똑같은 형률로 적용하면 기강이 서지 않는다는 이유로 더 엄하게 처벌하는 관행이 있었습니다. 사회 지도층으로서 더 강한 책임을 물었던 것입니다. 양반 여성이 다른 남자와 눈이 맞으면 장형으로 다스린 뒤 관에서 일하는 여종인 관비로 만들거나 유배를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유감동은 '대명률'에 따라 장형을 받은 후 변방에 있는 관야의 여종으로 보내집니다. 비록 사면을 받더라도 한평생 여종으로 살면서 영원히 그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한 조치였습니다. 그런데 이 마저도 8개월 후에 관비가 되는 대신 신분을 되찾고 먼 지방에 유배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이는 당시 왕이었던 세종의 결정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사헌부는 유감동을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세종은 더 이상 추국하지 말라며 일축했습니다. 왕인 세종 덕분에 유감동은 극형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충격적인 자백
유감동 사건이 일어나고 53년이 흐른 1480년, 어우동은 유감동과 같은 결말을 바라면서 눈이 맞은 남자들의 이름을 의금부에 죄다 실토했습니다. 어우동의 자백은 조정을 뒤흔들게 되었습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사건에 얽힌 이들의 숫자였습니다. 어우동이 실토한 남자의 수는 무려 17명이었습니다. 지체 높은 종친의 아내가 수많은 남성과 부도덕한 행위를 했다는 것은 그만큼 큰 논란거리였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대범한 장소 선정 때문이었습니다. 어우동이 자백하는 과정에서 눈이 맞은 장소가 드러났는데, 그 장소가 실로 기상천외했기 때문입니다. 수산수 '이기'와는 공공기관 건물에서 만났다고 하고, '김휘'라는 사람과는 길가의 집을 빌려서 만났다고 합니다. 가장 충격적인 장소는 바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었습니다. 부도덕한 관계에 있는 남녀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매우 성스러운 공간인 사당에서 부부의 윤리를 깨뜨리는 행위를 했다는 것은 유교 국가 조선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유교의 근간을 흔들어놓는 일이었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어우동 사건에서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가 된 것이었습니다. 바로 신분을 가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신분사회인 조선은 반상의 구별이 엄격했습니다. 특히 조과 주인의 나뉨을 뜻하는 노주지분은 절대 바뀔 수 없는 신분 관계를 말합니다. 그런데 어우동이 만난 남자 중에는 지거비라는 노비도 있었던 것입니다. 신분 질서가 어지럽혀지는 것을 금기로 했던 조선에서 신분이 다른 남녀가 만난다는 것은 사회적 금기에 대한 도전이나 다름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