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연산군의 출생과 가정
연산군은 조선 제9대 왕 성종과 중전 윤 씨 사이에서 적장자로 태어났습니다. 적장자란 정비의 소생 중에서도 맏아들을 의미합니다.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 씨는 원래 후궁이었는데, 성종의 첫 번째 중전인 공혜왕후가 자녀 없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연산군을 임신하고 있던 윤 씨가 중전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적장자가 왕위를 계승한다는 원칙이 있었지만, 27명의 왕 가운데 적장자로 태어난 사람은 단 7명뿐입니다. 그만큼 흔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성종만 하더라도 예종의 아들이 아닌 조카였고, 그중에서도 차남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정통성을 지닌 왕실의 후계자가 탄생했으니 무척이나 기뻐했을 것입니다. 적장자 연산군은 성종의 기쁨이자 조선의 경사였습니다. 그러나 흥겨운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비극이 벌어진 날은 연산군이 4살이 되던 해, 1479년 6월 1일이었습니다. 중전 윤 씨의 생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성종은 그날 밤 중전이 아닌 다른 후궁의 처소를 찾았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윤 씨는 화를 참지 못하고 직접 성종이 있는 방으로 쫓아갔습니다. 방에 들이닥친 윤 씨는 후궁을 내쫓은 뒤 성종과 큰 부부싸움을 벌입니다. 성종은 이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바로 다음 날 윤 씨의 신분과 지위를 빼앗아 폐서인으로 만들어 궁에서 내쫓아버렸습니다. 성종은 이것도 모자라 3년 후, 폐비 윤 씨에게 사약을 내립니다. 연산군이 7살이 되던 성종 13년의 일이었습니다. 성종이 폐비 윤 씨의 죽음과 관련된 일을 아들에게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연산군은 새 중전이 된 성종의 세 번째 왕비 정현왕후를 자기 친어머니로 믿고 자라게 됩니다.
삼사와의 갈등
연산군은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연산군은 최고의 자리인 왕위에 올라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자기의 뜻에 반대하는 신하가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왕의 잘못을 지적하는 삼사는 연산군에게 눈엣가시 같은 곳이었습니다. 삼사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선 사헌부는 관직에 있는 자를 감찰하는 기구인데 현재의 검찰 및 감사원의 기능을 했습니다. 사간원은 왕과 신하의 잘못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기관으로 언론기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홍문관은 경연을 준비하고 정치를 연구하며 왕이 궁금해하는 일에 자문을 맡은 기관입니다. 이 기관은 왕이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잘못을 지적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연산군은 성종이 죽은 바로 다음 날부터 삼사와 기싸움을 시작했습니다. 바로 아버지 성종의 제사, 수륙재 때문이었습니다. 수륙재는 장수나 명복을 비는 불교식 제례인데, 선왕을 추모하는 목적으로 왕실에서 계속 시행해 오던 것이었습니다. 연산군도 관례대로 수륙재를 지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삼사가 반기를 들고 나섰습니다. 성종이 유교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매우 노력한 왕인데, 그런 성종에게 불교식 제례를 시행하는 건 맞지 않다며 반대한 것입니다. 역사를 되짚어보면 성종 때부터 국왕과 언론 삼사 사이의 갈등이 심화하고 있었습니다. 삼사의 영향력이 매우 커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와중에 수륙재로 왕과 삼사 관원들 사이에 갈등이 불거진 것입니다. 명분도 충분했습니다. 불교는 이단이고, 이단의 의례를 유학의 군주인 성종에게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강한 왕권을 꿈꿨던 연산군에게 언론 삼사는 모든 일에 딴지를 거는 존재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무오사화
연산군과 삼사의 첨예한 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연산군은 즉위 4년이 되던 해에 결단을 내립니다. 자신에게 사사건건 반대하는 신하들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 1498년 7월 17일, 여러 재상과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 삼사의 관리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데 그곳으로 수십 명의 병사들이 들이닥쳤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병사들의 손에는 철쇄가 들려 있었고, 그들은 관료들을 무자비하게 끌고 나갔습니다. 이 사건이 바로 연산군 폭정의 서막인 무오사화입니다. 사화란 선비 '사', 재앙 '화'라는 한자에서 알 수 있듯이 선비들이 화를 입은 사건을 말합니다. 무오년에 일어난 사화라서 무오사화라고 합니다. 조선 시대에는 총 4번의 사화가 있었는데, 연산군이 일으킨 무오사화는 조선 최초의 사화였습니다. 무오사화는 사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왕이 죽으면 그 왕의 행적들을 정리하여 기록으로 남기는데 이를 실록이라 합니다. 실록을 만들려면 기본적인 자료가 있어야 하는데, 사관이 적어둔 사초가 바로 그 자료가 됩니다. 그런데 이 사초에서 문제가 되는 내용을 발견한 것입니다. 또한, 무오사화에는 신하들끼리의 대결 너머, 자신을 괴롭힌 삼사를 치겠다는 연산군의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군주의 입장에서 보자면 국정 주도권을 확보하고 관료 조직에 대한 왕의 통제력을 강화하려는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사형, 유배, 파직을 당하고 나서야 조선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는 끝을 맺게 됩니다. 무오사화로 삼사를 제압함으로써 연산군은 강력한 왕권 회복을 꿈꿨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