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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 원나라에서 태어난 이유, 위화도 회군, 두 가지 가설

by 다시한번도전 2024. 6. 30.

위화도에서 회군한 태조 이성계
태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태조 이성계 원나라에서 태어난 이유

태조 이성계는 1335년 원나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고려인이었지만, 고려 땅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먼저 그의 가문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성계가 태어날 때 그의 가족은 고려의 동북면, 오늘날 함경남도 영흥 지역에 살고 있었습니다. 전주 이 씨 집안이 북쪽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이성계의 고조할아버지인 이안사 때의 일입니다. 이안사는 전주의 호족 세력이었는데, 전주에 살 당시 그 지역의 관리와 갈등을 빚게 됩니다. 더 큰 문제는 관리가 조정에까지 이 문제를 보고하려 한 것입니다. 위협을 느낀 이안사는 전주를 떠나 식솔과 가병들을 데리고 강원도 삼척으로 갑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관리가 이번에는 강원도 지역으로 부임한다는 소문을 듣게 됩니다. 질긴 인연 탓에 삼척에도 있을 수 없게 된 이안사는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 동북면 의주에 정착했습니다. 그리고 의주 지역을 지키는 의주 병마사라는 관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당시 고려는 몽골제국과 오랜 전쟁을 치르는 중이었습니다. 고려인들은 몽골에 결사항전 했지만, 차례로 영토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안사가 살고 있던 동북면 또한 몽골 땅이 되었습니다. 이후 이안사는 몽골로 망명했고, 1271년 몽골이 국호를 세워 원나라가 되자 이안사의 국적도 고려에서 원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안사는 원나라 관직을 받고 능력을 펼쳐 자신이 살고 있던 지역에서 확고한 지지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강력한 토착 세력 중 하나로 성장해 아들과 손자, 증손자에게도 관직과 재산, 군사들을 물려주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성계는 고려인이지만 원나라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위화도 회군

고려 말기, 국내외 정세는 극도로 혼란스러웠습니다. 원나라의 쇠퇴와 명나라의 부상, 그리고 왜구와 여진족의 침입으로 인해 고려의 국력은 쇠약해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려 정부는 요동 정벌을 결의하고, 이성계를 포함한 군사를 파견했습니다. 요동 정벌의 주도자인 최영은 명나라와의 충돌을 감수하고서라도 북방 세력의 견제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성계는 이를 반대하며 국내의 혼란을 우려했습니다. 1388년 5월, 이성계는 최영의 명령을 따라 요동으로 출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군사는 위화도에 이르러 이성계는 정벌의 무의미함과 군사적 위험성을 이유로 회군을 결심했습니다. 그는 '4 불가론'을 내세워 군사 행동의 부당함을 주장했습니다. 이에 따라 이성계는 군사를 돌려 개경으로 돌아왔고, 이를 '위화도 회군'이라 부릅니다. 위화도 회군은 정치적 대변혁을 초래했습니다. 이성계는 회군 후, 정권을 장악하고 최영을 비롯한 반대 세력을 제거했습니다. 이후 이성계는 개혁을 통해 민심을 얻고, 새로운 왕조를 세울 기반을 다졌습니다. 1392년, 이성계는 마침내 고려를 폐하고 조선을 건국했습니다. 이는 고려 왕조의 500년 역사를 종결짓고, 조선 왕조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위화도 회군은 단순한 군사적 사건을 넘어, 한 시대의 종말과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이성계는 군사적 능력뿐만 아니라 정치적 지도력도 입증하였으며, 이는 그가 조선 왕조의 초대 왕으로서 자리매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두 가지 가설

위화도 회군은 고려를 완전히 뒤집어놓았습니다. 나라를 바꿔놓은 사건인 만큼 위화도 회군을 보는 시선 또한 다양합니다. 두 가지 가설이 유력한 편인데 첫 번째는 요동 정벌이 이성계를 죽이려 한 최영의 의도적인 함정이라는 시각이고, 두 번째는 위화도 회군이 이성계의 예정된 계획이라는 시각입니다. 첫 번째 시각은 조선 후기 실학자 이긍익의 저서 '연려실기술'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이성계를 따르는 사람이 늘고 그가 왕이 된다는 소문까지 돌자 최영이 요동 정벌을 핑계 삼아 이성계를 제거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요동 정벌에 실패한다면 이성계는 책임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고, 만일 성공한다 해도 전투 과정에서 병력 손실이 불가피할 테니 이성계의 세력은 약화하였을 것입니다. 최영으로서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최영의 성품을 봤을 때 실제였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이기도 합니다. 이성계가 철저한 계획에 따라 위화도 회군을 단행했다는 주장에도 근거가 있습니다. 바로 가별초의 도착 날짜입니다. 이성계가 개경 근처에 도착한 날은 6월 1일, 동북 면에 있던 천여 명의 가별초가 이동해서 이성계와 합류한 날은 6월 2일이었습니다. 하루 차이로 개경에 도착한 것입니다. 그런데 동북 면에 있던 가별초가 개경으로 오려면 험한 백두대간을 넘어야만 했습니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동북 면에 소식을 전하고 출발했다면 둘이 이렇게 비슷한 시기에 도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즉, 이성계가 반역 계획을 미리 공유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전부터 회군을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최영과 이성계만이 알겠지만, 확실한 것은 변방의 무사로 20년간 고려를 위해 싸웠던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을 제거하고 군사권을 장악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