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홍범도 장군 군대 생활, 불의에 맞선 삶, 의병부대를 조직한 이유

by 다시한번도전 2024. 7. 9.

홍범도 장군의 군대 생활
홍범도 장군의 군대 생활

 

홍범도 장군의 군대 생활

1868년 10월 12일, 평양의 한 가정집에서 한 아이가 우렁찬 울음소리를 내며 태어났습니다. 바로 홍범도입니다. 그런데 홍범도는 태어나자마자 커다란 위기를 맞닥뜨리고 맙니다. 홍범도가 태어난 지 7일밖에 되지 않았을 때 어머니가 출산 후유증으로 숨을 거둔 것입니다. 머슴이었던 홍범도의 아버지는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아이가 있는 집을 이리저리 찾아다니며 젖동냥으로 홍범도를 키웠습니다. 홍범도가 아홉 살이 되던 해,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어린 홍범도는 아버지처럼 머슴살이하면서 스스로 생계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평탄치 않은 삶을 살아가던 홍범도에게 한 줄기 희망 같은 소식이 들려옵니다. 평양 관청에서 군인을 모집한다는 것입니다. 머슴보다는 군인의 삶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 홍범도는 군대에 입대하기 위해 바로 길을 나섰습니다. 당시 홍범도에게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나이였습니다. 입대가 가능한 나이는 17살이었고 홍범도는 15살이었습니다. 나이가 어려 입대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한 홍범도는 나이를 속여서 평양 소속 조선군에 들어갔습니다. 홍범도는 사격과 제식 훈련에 뛰어난 실력을 보였습니다. 그야말로 군대 체질이었습니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평양의 병력 일부를 차출해 수도 한양의 치안과 관청 경비를 맡겼고, 이때 홍범도는 실력 면에서 눈에 띄는 병사였기 때문에 파견 근무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홍범도가 눈에 띌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한 가지 또 있었습니다. 홍범도의 키는 무려 190센티미터 정도였습니다. 매우 거대한 체격의 소유자였던 홍범도는 군대에 잘 적응하며 열심히 생활했습니다.

 

불의에 맞선 삶

홍범도는 군 생활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군 장교들의 가혹 행위가 있었고 농민 봉기 진압과 가난한 백성의 세금 징수에 군인들이 투입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홍범도는 백성을 억압하는 데 일조하는 군대의 부조리에 괴로움을 느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건 때문에 홍범도는 더는 군 생활을 이어 나갈 수 없게 됩니다. 홍범도가 병사들을 괴롭히는 장교를 때려눕힌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군대는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머슴 출신 홍범도가 양반 신분의 장교를 때린 것이니 홍범도의 하극상은 매우 심각한 문제로 불거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군대에 있으면 무거운 처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홍범도는 4년간의 군 생활을 뒤로하고 군대 밖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렇게 도망친 홍범도는 제지소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지소에서 일을 시작한 지 3년이 지난 어느 날, 제지소를 뒤흔든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번에도 홍범도가 제지소 주인을 때려눕힌 것입니다. 오갈 데 없는 홍범도의 사정을 알고 있는 제지소 주인이 말썽 없이 열심히 일한 홍범도를 3년간 괴롭히며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홍범도는 계속되는 부당한 대우를 참지 못하고 들고 일어선 것입니다. 조선총독부에서 홍범도에 관해 서술한 기록 중에는 '홍범도의 성격은 호걸의 기풍이 있다'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그는 도덕적이고 정의감이 있는 불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스물두 살의 홍범도는 군대에 이어 제지소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갈 곳을 잃은 홍범도는 강원도 금강산에 있는 절, 신계사로 가서 스님에게 사정을 설명한 뒤 절에 머물면서 수도 생활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스님이 받아준 덕분에 홍범도는 절에 들어가 잔심부름하고 글을 깨우침과 동시에 불교 경전을 배우면서 지내게 됩니다.

 

의병부대를 조직한 이유

홍범도는 절을 떠나 함경남도 북청군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사냥꾼이 되었습니다. 산악지대로 둘러싸인 북청군에는 곰과 멧돼지뿐 아니라 표범과 호랑이 같은 맹수도 서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홍범도는 뛰어난 실력을 보이며 북청군 일대의 대표 사냥꾼이 되었습니다. 그런 홍범도에게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1907년, 광무황제를 강제로 폐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킨 일제의 만행에 분노해 전국 각지에서 일본에 맞서겠다며 의병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바로 '정미의병'입니다. 의병이 일어나자 일본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만들어 조선인들이 가지고 있는 총과 탄약을 압수하고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처벌했습니다. 사냥꾼에게서 총을 뺏어 가는 것은 농사꾼에게 곡괭이를 뺏는 것과 같았습니다. 사냥꾼 홍범도에게는 총을 압수당하는 것 자체가 생계에 위협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일본은 홍범도에게 가족의 생계를 위협하는 '적'이었습니다. 홍범도는 총을 압수당하기 전에 북청군 일대에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동료 포수들을 설득했고 자신과 함께할 70여 명의 사람들을 모아 산포수 의병부대를 조직했습니다. 그해 11월 중순, 마침내 홍범도는 부대를 이끌고 함경남도 북청군과 풍산군 사이에 있는 높이 약 1,335미터의 험준한 고개 '후치령'으로 향했습니다. 후치령은 북청군에서 내륙으로 향하는 교통상 요지로 일본군이 자주 출몰하는 길목이었습니다. 홍범도는 이곳에서 일본군을 공격하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홍범도가 이끄는 의병부대는 매복해 있다가 지나가는 일본군을 향해 사격을 가했습니다. 적을 기습적으로 공격하는 게릴라 전술을 사용하는 홍범도 의병부대의 공격에 일본군은 저항 한 번 하지 못한 채 모두 사살되었습니다. 이후로도 홍범도 의병부대는 후치령을 지나는 일본군 소탕에 성공합니다.